'어부사시사' 윤선도가 지은 정원, 그 자체로 예술
김종길 입력 2018.03.13. 15:18
[오마이뉴스 김종길 기자]
무대가 있는 정원, 예술로 승화된 정원
1748년, 고산의 5대손인 윤위가 보길도를 답사하고 고산의 유적을 기록한 <보길도지>에는 고산 윤선도가 세연지에서 제자와 동자들과 함께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며 뱃놀이를 했다고 적혀 있다.
고산은 "하루라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며 당 위에서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고, 동대와 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건너편 산 옥소대에서 긴 소매 차림으로 춤추게 했다.
윤선도가 조영한 정원은 세속에 물든 정서를 환기시킨다. 그가 무대에서 펼친 예술 세계는 세속을 벗어나려는 정서를 더욱 심화시킨다. 사방에서 음악이 울리고 너울너울 춤사위가 펼쳐지는 가운데 뱃놀이에서 감정은 최고조에 달한다.
회화와 음악이 어우러져 풍경의 아름다움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못 중앙에 배를 띄우고 남자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한다. 노를 저어 뱃놀이를 하면서 <어부사시사>를 부른다. 노랫소리가 정원 가득 울리고 못 속에 비친 그림자는 이미 세상 밖의 풍경이다. 세상사는 자연 잊고 만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꾸나
지국청 지국청 어기여차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다가온다
어부가 없는 <어부사시사>는 시로 그려진 그림이다. <어부사시사>에서는 세연정 일대의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풍경을 노래한다. 동대에 가까운 계담이 동호이고, 서대에 가까운 회수담이 서호임을 알 수 있다.
눈으로 보는 풍경을 시로 지어 그림처럼 묘사하고 노래를 불러 합일된 세계를 창조한다. 걸음마다 시상을 떠올리며 노래하고, 걸음마다 아름다운 풍광에 취한다. "하늘과 땅이 제각기인가 여기가 어디메뇨"라는 대목에서는 세연정과 낙선재를 넘어 자연 속에 살고자 하는 호방한 기개마저 보인다.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가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가였다. 그가 언제부터 정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수정동, 문소동, 금쇄동, 부용동 등 오십 대부터 평생에 걸쳐 정원을 조성했으며 그가 조성한 정원들은 하나같이 빼어났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개인이 조성한 정원의 수나 아름다움에서 고산을 넘어서는 사람은 없다. 고산은 머무는 곳마다 아름다운 산수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자연과 교감하는 생활을 즐겼다.
고산이 정원 조성에 뜻을 둔 건 이이첨의 전횡을 공박한 <병진소>로 인한 첫 유배에서 풀려나 해남 연동으로 이주했던 1627년으로, 그의 나이 마흔한 살 때로 보인다. 이때만 해도 정원을 조성하기보다는 대둔산, 두륜산 등 해남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즐기며 자연에 대해 알아가는 시기였다.
그중 부용동은 가장 규모가 크고 고산이 최후까지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주요 생활공간이었던 낙서재와 풍류를 즐겼던 세연정, 신선처럼 살고자 했던 동천석실을 매일같이 오가며 그는 자신만의 정원 생활을 즐겼다.
당대 최고의 풍수가
고산이 죽은 후 정조는 <홍제전서>에서 그를 조선조에서 무학 대사 이후 가장 뛰어난 풍수가로 높이 칭송했다. 고산은 효종이 승하했을 때 왕릉 선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여러 곳을 답사하고 길지吉地로 추천한 곳은 수원 땅이었는데, 정적이었던 송시열, 송준길 등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뒷날 정조가 고산이 추천한 곳을 알아보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화성 융릉이다.
해남윤씨가 거주했던 이 세 곳은 풍수지리의 원리를 잘 반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산은 이러한 해남윤씨 집안의 가풍으로 전해온 자연 친화적인 풍수 사상과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잘 계승하여 문학적, 사상적으로 발전시켰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정원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해남윤씨 집안은 서남해의 바다를 적극적으로 경영했는데, 윤선도는 진도 굴포에 약 이백 정보, 보길도 바로 옆 노화도에 약 일백삼십 정보를 간척하기도 했다. 부富에 대해 등한시하지 않은 그의 실용적인 경세치용사상을 엿볼 수 있다.
"내가 산수를 사랑하는 버릇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반드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요, 나 또한 스스로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여위게 하고, 음악이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고 하였으니, 비유컨대 재산은 고기이고, 천석은 음악과 같다. 나의 취하고 버림이 진실로 이러한 뜻에 있으니, 후세의 군자들이 반드시 이를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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