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수맥 자료

울진, 격암 남사고 上

수맥박사 2012. 12. 29. 11:04

 

부친묘 명당 이장 실패와 아들에서 끊긴 후손… ‘천기 누설’ 응보인가

울진군 근남면 구산4리 신봉산 기슭에 있는 격암 남사고의 묘. 남사고는 자신의 죽음까지 예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남사고가 양사언과 교유를 맺기 얼마 전의 일이다. 그 무렵 남사고는 열다섯 살에 운학도인에게서 건네받은, 천문과 역학을 기록한 비서(秘書)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극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책을 묶은 삼끈이 몇 번이나 끊어지도록 연구를 하던 그는 어느 순간 책에 쓰여 있는, 예전에 미처 몰랐던 수많은 시공(時空)의 비밀들을 홀연히 깨닫게 되었다. 그건 조용하던 물이 비등점에 이르면서 급작스럽게 끓어 넘치는 것과 비슷했다. 그것은 가히 세상에 드러내선 안 될 하늘의 비밀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서(易書)를 풀어서 미래의 일을 알 수 있게 된 그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예언을 남겼다. 나중 양사언에게 언급하게 되는 동서분당은 물론이고, 삼십여 년 뒤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또 만일 용(辰)의 해에 전란이 있으면 나라를 구할 수 있으나 뱀(巳)의 해에 전란이 생기면 나라는 영영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으며, 재차 전란이 일어나도 적병이 강을 넘지 못하리란 예언을 남기기도 했다. 후일에 그 예언이 너무 정확한 바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전한다.

그뿐 아니었다. 명종이 승하하고 전혀 엉뚱하게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선조)이 즉위하리란 것을 정확히 예언한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벼슬에 나가기 일 년 전에도 그는 내년에는 태산(泰山)을 봉하게 되리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이듬해인 1564년(명종 19)에 문정왕후가 별세하여 태릉(泰陵)에 장사 지내게 되었다. 이처럼 그의 예언은 놀랍도록 잘 들어맞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 당시 남사고는 소년시절 세 권의 기서를 넘겨준 운학도인이 책에 적힌 천기(天機)를 사사로이 누설치 말라는 당부를 깜빡 잊은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거듭 많은 이들에게 풍수와 길흉을 예언하면서 자연스레 경계심이 흐트러졌는지, 아니면 미구에 닥칠 국가적 환란과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우국(憂國)의 충정으로 운학도인의 당부를 애써 무시해버린 것인지, 그의 깊은 심중을 누가 알 수 있을 것인가.

남사고의 부친인 남희백의 묘는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대현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부친의 묘를 명당에 모시기 위해 아홉번이나 이장했지만 끝내 실패했다는 ‘구천십장(九遷十葬)’ 스토리가 전해지고 있다. 박관영기자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천기를 누설한 남사고가 내심 어떤 심각한 고민을 했는지는 그의 행적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나이 마흔 셋이었을 때 부친상을 입게 되었다. 효성이 남다른 그는 여러 날 산천을 돌아다니는 수고를 한 끝에 명당자리를 찾아서 부친을 장사 지냈다. 그러나 장사를 마치고 산세를 돌아보니 그가 택한 자리는 구룡쟁주(九龍爭珠,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툼)의 명당이 아니라 구사쟁와(九蛇爭蛙, 아홉 마리 뱀이 개구리 한 마리를 놓고 다툼)의 자리였다. 탁월한 풍수가로 소문난 그가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달리 어쩔 방도가 없었다. 길하지 못한 자리에 부친을 모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다시 다른 명당을 찾아서 부친을 장사지냈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세상에 드문 명당으로 판단해서 부친을 묻었지만 다시 보면 명당이 아니었다. 결국 다른 곳으로 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기이하고 이해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부친의 묘소를 이장하길 아홉 차례나 거듭한 끝에 그는 결국 부친을 명당에 모시는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장을 열 번하게 되면 큰 횡액을 당한다는 게 풍수학에 엄연히 나와 있기 때문이었다.

남사고가 이처럼 적지 않은 재물과 노고를 아끼지 않고 가히 필사적으로 명당을 찾아 아홉 번이나 부친의 산소를 옮겨야 했던 이유를 후대사람들은 그가 천기를 누설한 것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의심한다. 즉 부친을 천하의 명당에 모심으로써 천기를 누설하면 대가 끊어질 거라는 운학도인의 예언을 회피하려고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어려운 이장을 수년에 걸쳐서 아홉 번이나 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부친의 이장에 대한 실패를 제외하곤 당대의 풍수가로서 또 예언가로서 놀라운 경지를 보여주던 남사고는 한양으로 벼슬길에 나선 뒤에도 여러 예언을 남기는 한편 학문연구에도 열중하여 많은 저작들을 남기게 되었다. 이 시기에 ‘격암천자주(格菴千字注)’나 ‘이기도설(理氣圖說)’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등의 여러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 ‘이기도설’은 기(氣)를 음양작용의 근원으로 설정하고 그에 따른 자연현상을 설명한 책이고, ‘격암천자주’는 천자문에 주와 해석을 달아서 처음 글을 배우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책이고, 편년체의 예언서로 18세기 호남을 비롯한 남부지방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 ‘남사고비결’은 십승보길지지(十勝保吉之地)와 각 연대별 길흉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전란시에 난을 피해 살 만한 열 곳을 꼽았는데, 공주(公州)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무주(茂州)의 무풍(茂豊),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부안(扶安)의 변산(邊山 ), 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 봉화(奉化)의 춘양(春陽), 예천(醴川)의 금당곡(金唐谷), 영월(寧越)의 정동상류(正東上流), 운봉(雲峰)의 두류산(頭流山),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등이 그곳이었다.

또 태극도의 오묘한 이치를 탐구하여 우주적인 원리를 합리적 해석과 실용적인 측면에서 분석한 ‘완역도(玩易圖)’를 그린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이 완역도가 전란으로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사고가 종 6품인 관상감(觀象監) 천문학교수로 있던 어느 날이었다. 퇴청한 뒤 거처에서 역서를 읽다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바라보니 뜻밖으로 운학도인이 문밖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반가움에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정색한 운학도인은 이제 시한이 되었으니 책을 거두어갈 거라고 말했다. 뒤이어 천기를 누설한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되어 있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놀라서 눈을 떠보니 깜빡 선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분명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천문과 역학 책이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운학도사가 준 나머지 두 권도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날 남사고를 만난 관상감정(觀象監正) 이번신(李蕃臣)이 어젯밤 별자리를 살폈더니 태사성(太史星)이 문득 어두워지는 것이 곧 어떤 변고가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남사고가 빙긋 웃으며 그건 자신의 명운이라고 말했고, 이번신은 그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함께 웃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곧 남사고는 조정에 사표를 냈다. 당시 그는 한 줄의 시로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강물 남쪽에 경치가 좋은데 너무 늦기 전에 그곳에서 살아보리라(水南山色好 歸計莫樓遲)’.

관직을 사직한 남사고는 곧장 울진의 남수산 자락에 있는 거처로 내려왔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명운이 다했다는 그의 예언처럼, 조정을 사직한 다음 해인 1571년(선조 4)에 그는 향년 63세로 세상을 마감했다. 장사를 치르려고 생전에 남사고가 일 년 남짓 발품을 팔아 찾아낸 명당을 팠을 때 놀랍게도 땅속에서 물이 흥건히 솟구쳐 올랐다. 명당을 잘못 잡았던 것이다. 그 후 남사고는 다른 자리에 묻혔고, 그의 아들 대에서 후손이 끊기고 말았으니 결국 운학도인이 말한, 천기를 누설한 응보를 받은 셈이었다.

전우치가 예견했던 희대의 도인 격암 남사고는 그 뒤 1709년(숙종 35)에 울진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 생가 터인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누금마을에 그의 유적지가 있다. 또 그의 학설을 모은 ‘격암일고(格菴逸稿)’가 있고, 1993년 울진문화원에서 이를 번역한 ‘격암선생일고역(格菴先生逸稿譯)’이 있다.

글=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도움말=울진문화원, 윤대웅 울진문화해설사
공동 기획 : 울진군


◆ Story Tip

“올해는 광채가 없다” 남명 조식의 죽음도 예언

남사고의 예언은 신기에 가까웠다. 동서분당을 비롯해 임진왜란, 선조 즉위, 문정왕후의 죽음 외에도 남명 조식(1501~1572)의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남명 조식의 죽음에 대한 남사고의 예언은 율곡 이이(1536~1584)가 쓴 ‘석담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이는 ‘1572년 정월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던 처사(處士) 조식이 죽었는데, 그 전에 이미 남사고가 ‘올해는 처사성이 광채가 없다고 말하더니, 결국 조식이 죽었다’고 그의 일기에 기록했다.

남사고와 관련된 수많은 예언과 관련된 일화는 세월이 흐르면서 덧붙여진 경우도 상당수 있다. 하지만 남명 조식의 죽음을 미리 알아맞혔다는 이이의 기록을 보면 남사고가 당대에 예언가로서 상당히 이름을 떨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남사고가 집필했다고 전해지는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이라는 책도 흥미롭다.

남사고의 호를 따서 ‘격암유록(格庵遺錄)’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에는 6·25전쟁 발발과 남북분단 등 다양한 예언이 적혀있다. 이 책은 1977년 이도은(본명 이용세)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필사한 것이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학계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이 책의 원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점과 1977년에야 필사본이 공개된 점, 한자 표기법 일부가 현대어로 되어 있는 점, 성경의 일부 내용이 그대로 베껴진 점 등을 이유로 남사고의 이름을 가탁한 위서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를 두고 1995년 한 방송사에서 남사고비결의 진위를 파헤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의 진위 여부를 떠나 백성에게 희망을 주려고 한 남사고의 예언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보금 풍수 수맥 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