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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격암 남사고 中

수맥박사 2012. 12. 29. 11:01

 

나라와 백성을 위한 ‘변심’… 55세 때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다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남사고 유적지에 있는 남사고 생가터. 발굴 당시 석렬(石列)과 기와, 도자기 등이 출토돼 2채 이상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자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오십유오이지우학)’는 말처럼 남사고는 열다섯 나이에 운학도인에게 받은 세 권의 기서에 대한 연구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책에 대한 공부가 깊어갈수록 남사고의 명성도 서서히 산처럼 높아졌다. 그의 나이 마흔에 이르렀을 때 이미 그는 관동지역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할 만큼 명사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천하에 드문 풍수가나 도인, 혹은 탁월한 도학자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를 신라 문성왕 때 중국으로 건너가 신선술로 이름을 떨친 김가기(金可紀)에 비유했고, 어떤 이들은 신라시대 점복술과 은형술(隱形術)의 대가였던 김암(金巖)에 비견하기도 했다. 또 무슨 연유인지 불세출의 풍수가인 도선국사의 직통을 이은 제자라는 믿기 힘든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런 까닭에 가문의 영달과 출세를 위하여 길(吉)한 장소에 음택(陰宅, 산소)이나 집터를 마련하고자 찾아오거나, 자신과 가족의 명운과 앞날의 길흉, 궁합(宮合)과 길일(吉日)을 알아보기 위해 먼 길을 걸어서 찾아오는 자도 적지 않았다.

남사고 유적지 생가터 옆에 있는 수령 200년 이상 된 고욤나무. 자연의 순리에 주목하며 그 속에서 우주의 원리를 발견하려 했던, 남사고의 실천적 사상이 고목의 모습과 닮은 듯하다. 박관영기자
그러나 한편으로 도학자로서의 남사고의 해박한 지식과 교양, 학문적 세계를 논하고자 찾아오는 선비나 학자, 관리도 없지 않았다. 그중에는 봉래 양사언(梁士彦)이 있었다. 돈령주부 양희수의 아들인 그는 형 사준과 동생 사기와 함께 문필과 재주가 뛰어나다는 세간의 평을 받고 있었다. 후일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로 유명한 그는 자연을 즐기는 풍류가로서, 또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고을 수령으로서 한 점의 부정이나 축재도 꾀하지 않는 청백리로 이름난 인물이었다. 그는 스물아홉에 문과에 급제한 뒤 삼등, 함흥, 평창의 지방관을 거쳐서 당시엔 강릉 현령(縣令)으로 와 있었다.

남사고는 직접 주천대의 거처를 방문한 양사언을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원래 학문을 좋아하여 학자들과 교유를 즐겨하던 그였다. 그건 그의 성품이 활달하고 원만하기 때문이겠지만 울진이란 넓지 않은 지역에서 갇혀 지내다보면 부족해지기 쉬운 사상과 학문적 깊이를 더하기 위한 손쉬운 방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명망을 듣고 찾아온 문인학자들을 접하면서 그는 당대의 학문적 흐름과 더불어 세상사에 대한 지식은 물론, 풍류를 즐기는 법까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독학하다시피 한 그에게 더없이 필요한 일이었다.

남사고 유적지에 있는 자동서원. 남사고와 교류한 봉래 양사언은 남사고의 주역강론을 흠모해 그를 ‘자동선생(紫洞先生)’이라 칭하며 우러렀다. 박관영기자
당시 양사언의 나이는 남사고보다 여덟 살이나 아래였다. 또 남사고가 아직 벼슬이 없는 청의거사라면 양사언은 어엿한 고을 수령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 도학자로서의 예우를 갖추고 격의 없이 교분을 나누었다. 그들은 함께 불영계곡과 주천대의 자연을 음미하며 학문과 풍속, 도학과 역학, 천지음양의 조화에 대해 논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들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양사언의 초청으로 강릉에 갔던 남사고는 현청 누각에 양사언과 마주앉아 주역(周易)에 나온 천지음양의 조화에 대하여 토론하던 중이었다. 남사고의 해석을 듣던 양사언은 존경어린 표정으로 부지불식간에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선생님의 놀라운 학식에 경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앞으로 스승의 예로 모실 것이니 부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남사고에게 큰 절을 올리며 양사언이 말했다. 배울 게 있다면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스승으로 받든다는 말이 있듯 참으로 선비로서 격식 없는 태도였다. 남사고가 사양했지만 양사언은 예를 그치지 않았다. 그 후로 양사언은 남사고를 ‘자동선생(紫洞先生)’이라 칭하며 공경했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더욱 친밀한 교분을 나누었다. 시간만 나면 서로를 찾아가서 학문을 토론하길 즐겨 하였다. 점차 친분이 두터워지면서 남사고는 양사언에게 앞날을 예언할 수 있는 복서와 천기를 읽는 법을 전수해주었다. 이때 양사언은 ‘조정에 멀지 않아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서 국가의 근심이 막심하리라’는 말과, ‘명나라의 천자가 죽는다’는 남사고의 예언을 조정에 장계(狀啓)로 올리기도 했다.

양사언은 늘 남사고의 천문과 지리, 음양학 등의 학문적 깊이에 경탄했고, 널리 쓰이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다. 그는 주변 사람에게 ‘자동선생은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연구하는 일에 탁월하며, 음양의 묘를 연구하여 조화의 극에까지 도달한 공부가 고금에 우뚝하거늘 초야에 묻혀서 높이 발탁되지 않으니 못내 안타까운 일이다’고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아울러 남사고에게 벼슬길에 나갈 의향이 없는지 묻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남사고의 마음은 좀체 흔들리지 않았다. ‘군자는 뜻을 얻지 못하여 궁하면 홀로 한 몸을 닦고, 뜻을 얻어 벼슬을 하게 되면 천하를 다스린다(君子窮則獨善基 身達則兼善天下 : 군자궁즉독선기 신달즉겸선천하)’는 말처럼 언젠가 자연스레 자신의 학문을 세상에 펼칠 날이 오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위사람의 거듭되는 권유와 강릉 수령인 양사언이 높은 학식과 지혜로움으로 백성을 평안히 다스리는 모습을 보자니 조금씩 마음을 달리하게 되었다. 자신이 오랜 기간 애써 연마하고 깨우친 천문학이나 역서, 풍수학을 사사로이 개인을 위해 쓰느니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에 널리 쓰이는 게 좋겠다는 반성적 자각이 일었던 것이다.

결심을 내린 그는 준비를 마치고 과거장에 나갔다. 그러나 보기 좋게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독학으로 소학을 익히고 얼마간 경전을 읽긴 했지만 과거시험을 위한 체계적인 학문을 닦지 않은 그로선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몇 번의 낙방이 거듭되자 남사고는 자신의 공부가 부족함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그가 마을 친구인 전복룡과 함께 영주의 소수서원을 찾은 것은 마흔여섯 되던 1555년 무렵이었다. 가사를 정리하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1543년 풍기군수인 주세붕이 설립한 백운동서원은 이후에 역시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사액과 함께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여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되었다. 또 명종이 당시 대제학이던 신광한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하사하도록 한, 영남에 우뚝한 서원이었다.

남사고가 소수서원에서 학문을 닦고 있을 무렵의 일이다. 어느 날 때마침 소수서원을 찾은 퇴계가 유생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모인 자리에 나갔더니 상에 차려진 음식이 뜻밖으로 풍족했다. 평소엔 보리밥과 된장 따위의 한두 가지 반찬뿐인 초라한 식사였던 터였다. 어떻게 된 거냐고 연유를 묻자 유생 한 명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유생의 궁핍한 숙사생활을 안타깝게 여긴 남사고가 잠시 짬을 내어 인근마을의 유지에게 명당자리를 잡아주었고, 그 보답으로 음식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퇴계는 친히 남사고와 마주하여 일의 부당함을 차분히 설명했다. 가난한 유생을 긍휼히 여긴 건 십분 이해하지만, 복(福)은 마음을 닦을 때 생겨나는 법이며, 노력하지 않고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누가 애써 학문을 닦고 노동을 하겠느냐고 타이르듯 말했다. 이때 남사고는 자신의 사사로운 인정이 잘못되었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그는 퇴계의 가르침을 달게 받아들이고 학문에 전념했다. 이 일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 남사고는 자신의 호를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딴 격자(格字)로 ‘격암(格菴)’이라 지었는데, 그것은 ‘사물의 지극한 곳(極處)까지 이치를 궁리하겠다’는 의미로서, 이 어찌 도인의 배움을 향한 넓은 마음이라 아니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자신의 학문을 백성들을 위해 쓰겠다는 남사고의 큰 뜻과 달리 벼슬길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1564년경에 비로소 종 9품인 사직참봉(社稷參奉)직을 제수받고 벼슬길에 나섰으니, 이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다음회에 계속)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도움말=울진문화원, 윤대웅 울진문화해설사



백성의 삶과 직결된 남사고의 예언

Story Tip

조선 중기 최고의 예언가 남사고는 ‘주역’의 원리에 통달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주자학자들처럼 주역의 원리를 사람의 마음과 도덕적 원리에만 적용하지 않았다. 그는 우주의 원리를 예측하고 그것을 민초들의 삶에 적용하려 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을 통해 백성이 희망을 갖고 좋지 않은 일에 대비하게 하려 했던 것이 ‘남사고 예언’의 핵심이다. 동서분당을 비롯해 임진왜란 발발, 문정왕후의 죽음, 선조 즉위를 예언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남사고의 예언은 당시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였다. 백성들은 훈구세력에 토지를 수탈당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해 소출의 대부분을 소작료로 내야 했다. 이상세계를 꿈꾸며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들은 사화(士禍)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길에 올랐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남사고는 현실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에 희망을 찾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주역’에서 찾으려 했다.

남사고의 실생활이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이었던 것도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그는 술을 가져다주는 친구가 있으면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고 한다. 또 그의 부인이 술을 담가 놓으면 채 익기도 전에 표주박을 띄워 자작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서 술동이가 바닥나도록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난 때문에 허름한 집에 살면서도 화초를 심어 꽃이 피면 시를 읊기도 했다. 주역에 통달했지만 도덕적 원리에 집착하지 않고, 격식없이 술을 대접하며 작물을 경작하는 실제적인 삶을 더 중시한 것이다. 즉, ‘주역’을 공부하면서 원리와 이치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직접적인 삶의 과정에 중심을 두었다. 이 때문에 그의 예언은 실제적이고 백성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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